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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콘스탄티누스 1세

by 까롱 2022.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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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콘스탄티누스 1세(라틴어: 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 us, 272년 2월 27일 - 337년 5월 22일)는 중기 로마 황제(재위 306년~337년)이다. 흔히 기독 교사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통칭하며, 동방 정교회는 모두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 (대) 콘스탄티누스(그리스어: Μέγας Κωνσταντίνος, 라틴어: Sanctus Constantin us Ma NGA)로 호칭한다. 306년 7월 25일 브리타니아의 요크에서 병사들에 의해 군주로 추대되어 337년 사망하는 날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초기

 

콘스탄티누스 1세는 272년 또는 273년 2월 27일 로마 제국의 모이시어 슈페리어를 속주(현재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나이스에서 장군 콘스탄티우스 틀로 루스와 그의 첫째 부인 성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성녀 헬레나는 여관 주인의 딸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92년 아버지는 헬레나를 버리고 제국 서방 구역의 정제인 막시미아누스의 딸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305년 2명의 정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은퇴하고 콘스탄티우스가 막시미아누스의 뒤를 이어 서방의 정제로 승격하게 되자 콘스탄티누스는 즉각 니코 메디아를 떠나 갈리아에 있는 아버지의 휘하로 들어갔다. 부제에는 세베루스와 막 시킬 뉴스 아 뉴스 다이아몬드가 추대되었는데 사실상 부제의 위치(즉, 정제의 아들)에 있었던 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는 권력에서 소외된 셈이었다. 병사들에 의한 콘스탄티누스의 정재 승계는 당시 사두 정치 체제 아래에서 적법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의 권좌 승계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였고,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승계하도록 하되 부제로 인정하고 서방 정제로는 세베루스를 임명하였다


서방의 통치

 

제국 내에서 콘스탄티누스의 관할 구역은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 갈리아, 그리고 게르마니아 지방이었다. 이로써 그는 중요한 라인강 방위선의 강력한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갈리아 지방은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 중의 하나였으나 이른바 제3세기의 위기 동안에 인구는 소실되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306년부터 316년까지 10년 동안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라인강 방위선을 굳건히 하고 갈리아 지방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당시 그의 주요한 거주지는 트리어였다. 307년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사두 체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봉기하고 막시미아누스도 은퇴 생활에서 복귀하여 아들을 도왔다. 서방의 정제인 세베루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진격하지만 정제인 막시미아누스가 지휘하는 군대에 궤멸당하고 세베루스는 로마로 잡혀가 자살을 강요당해 죽는다. 311년 갈레리우스가 죽자 리키니우스가 동방의 정제로 취임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독자적인 황제의 권리를 주장하는 막센티우스를 처단하기 위해 출정했다. 313년 동방의 정제 리키니우스와 서방의 정제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에서 만나 콘스탄티누스의 동생 콘스탄 치아를 리키니우스에게 결혼시켜 서로의 동맹관계를 확인하고 제국의 여러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기독교를 사실상 공인하게 되는 밀라노 칙령도 여기서 발표된다. 이 회담은 짧게 끝났지만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몬드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리키니우스의 영토를 침범하였다. 리키니우스는 막시미누스의 공격을 격퇴하고 동방에서 일인자의 지위를 굳혔다



324년~죽음

 

콘스탄티누스가 유일한 황제로 등극하고 제국의 권력과 부와 문화 등의 중심지는 급격하게 동로마 제국으로 이동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을 자신의 도시로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원로원과 로마와 같은 공공건물을 지어 새로운 로마 Nova Roma로 불렀다. 그의 사후에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개명된다.

326년 콘스탄티누스는 아들 크리스튀스를 계모와 간통했다는 죄목으로 체포하여 고문 끝에 사형에 처했다. 크리스티스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지만 없이 29세의 나이로 처형되었다. 아내 파우 스타도 목욕을 하다가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죽였다.

콘스탄티누스는 337년 죽기 바로 직전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죽기 직전까지 세례를 받는 것을 미루어서 현세의 죄를 온전히 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신은 비잔티움으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 그의 권좌는 파우스트가 낳은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에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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