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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이스라엘

by 까롱 2022.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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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종교

 

2021년 기준으로, 이스라엘 인구는 9,343,140명으로 추산되었으며, 이 중 74.2%는 이스라엘 정부 당국에 유대인으로 기록되었다.  아랍인들은 전체 인구의 20.9%를 차지하며, 반면 정부 등기소에 등록된 비아랍계 기독교인 및 무신론자들은 4.8%이다.  지난 10년간, 루마니아, 태국, 중국, 아프리카, 남미에서 온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정확한 수치는 알려지지 않지만, 그들의 많은 수는 불법으로 거주하며  이들의 수는 166,000명에서 203,000명 사이로 추정한다는  2012년 6월 무렵으로, 대략 60,000명의 아프리카계 이민자들이 이스라엘에 들어왔다.  이스라엘인의 대략 92%는 도시 지역에 거주한다.  OECD가 2016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의 평균 수명은 82.5세로, 세계에서 6번째로 높았다 이스라엘이 위치하는 지역은 고대에는 비옥한 초승달 제대로 알려진 지역이며, 가나안의 땅이라고도 불려, 가나안임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다. 성경의 기술에 의하면, 유대인의 선조에 해당하는 히브리인 또한 이 지역에 거주를 위해 이동해 왔으나, 그 자손은 이집트로 이주하였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집트인의 노예 취급을 받았다. 이윽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이 지역으로 돌아온 히브리인(이스라엘인)은 이 지역을 정복하여 기원전 11세기경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8~20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 기원전 930년경, 내란으로 인해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멸망하며, 남쪽의 유다 왕국은 기원전 586년에 신 바빌로니아에 멸망했다. 신 바빌로니아 기원전 539년에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2세에 의해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다 기원전 1세기경 하스콘 왕조는 로마 제국의 보호국이 되며, 그 후 로마 제국의 속주인 유대 속주가 된다. 63~64 기원후 66년 제1차 유다 전쟁이 발발하나, 70년 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된다. [75~79 바른 코크 바의 난(제3차 유다 전쟁)이 일어나, 135년 다시 로마 제국에 진압되어, 시리아의 속주가 되었다. 82~89 이후 유대인들은 중동 전역으로 흩어지며, 난민들이 세운 디아스포라가 다수 발생하게 된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가 영국의 위임 통치받던 팔레스타인의 강제적인 분할 계획을 채택하여 실행을 추진하였으나, 이에 동의한 유대인과 달리, 이에 동의하지 않은 아랍인은 추후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된다. 1948년 5월 14일, 세계 시오니즘 단체 경영이사, 그리고 팔레스타인 유대인 기구의 대통령 다비드 벤구리온은 "에레즈 이스라엘에서 유대 국가를 수립하고 이스라엘 국가로 한다"라고 선언했다. 중동 전쟁하는 동안 요르단강 서안 지구, 시나이반도 (1967년~1982년 사이), 남 레바논(1982년~2000년 사이), 가자 지구와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지역을 부분 합병했지만,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의 국경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요르단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은 여전히 이 지역의 갈등 불씨로 작용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패전한 오스만 제국은 현재의 터키를 제외한 중동 지역 대부분을 영국과 프랑스에 내주게 되며, 트랜스 요르단 (지금의 이스라엘이 위치한 곳. 지금은 팔레스타인으로 불림) 지역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오스만의 세금 정책에 의해 황무지가 되었던 트랜스 요르단은 유대인들과 아랍 유민들이 유입되어 여기저기 공동체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공식 외교 정책이 되었다. 하지만 아랍과 유대인에게 이중적인 약속을 함에 따라, 다음에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갈등을 유발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영국군이 위임 통치령 지역을 철수하기 이전부터 이주 유대인과 아랍인 간 테러와 학살 같은 국지적인 충돌이 있었고,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자치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후, 영국의 공식적인 철군이 이뤄진 다음 날, 이스라엘은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그 동시에 아랍인들의 물리적인 침공을 받게 된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의 지원은 없었고, 되려 전후 피로감에 영국, 프랑스, 미국 어느 나라도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은커녕 판매조차 소극적이었던 탓에 쏟아지던 전후 물자들을 매입하여 방위력 공백을 메꾸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후 제2차 중동 전쟁(사나이 전쟁)과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차후 중동 전쟁들에서 서방의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국가들은 아라비아 지역에서의 유대인 국가 건설에 부정적이었고, 이후 유대인-아랍인 간의 충돌은 지속되었다. 한편, 팔레스티나 지역(가나안 연안)의 아랍인들은 자신을 팔레스타인 주민, 그들의 거주 구역을 팔레스타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팔레스타인이라는 공동체가 본래 토착민으로서 거주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20세기 유대인들의 이주와 동시에 이 지역으로 밀려들어 온 아랍인들을 뜻한다. 장기간에 걸친 팔레스타인과의 분쟁 결과, 1993년에 PLO와 자치에 합의하여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세워졌으나 현재까지도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북쪽으로는 레바논, 북동쪽으로는 시리아, 동쪽으로는 요르단, 남서쪽으로는 이집트, 서쪽으로 지중해와 접해 있다. 이스라엘은 지리적 특징상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가까우며 민족적 특성상으로도 오히려 아프리카인 이집트에 가깝다. 바다와 사막의 사이에 펼쳐진 지역으로 특이한 기후로 인하여 이웃 민족 간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은 여러 작은 지역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 작은 지역들은 서로 전혀 판이하지 않는다. 이들은 해안 평야 지대, 구릉 지대, 중앙 산맥 지대, 요르단 계곡 지대, 트랜스 요르단 지대, 그리고 북쪽과 남쪽의 이스라엘 평야 지대와 네게브 광야 지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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