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학 역사학

나치 독일

by 까롱 2022. 10. 4.
반응형

나치 독일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 총통 치하의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을 일컫는다. 나치 독일은 정부에 의하여 국민들의 삶을 통제하는 전체주의적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고, 신성 로마 제국과 독일 제국을 이어받은 국가로 자칭하며 자신을 대독 일국(독일어: GroßDeutsche Reich 그로스 돈이 체스 라이히[*]) 또는 제3 제국(독일어: Drittes Reich 그리 테스 라이히 등으로도 불렀다. 일반적으로 히틀러가 수상직에 오른 1933년 1월 30일을 나치 정권의 시작으로 보며,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으나 1945년 5월 연합국에 패전함으로써 약 12년 만에 멸망하였다. 나치당의 주요 이념에는 인종차별주의, 우생학, 반유대주의 등이 포함되었다. 세계의 모든 인종 중 백인계 아리아인을 가장 우등한 인종으로 여겨졌고, 그중에서도 독일인이 천부적으로 최고인 민족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치당은 집권 직후부터 유대인들과 롬 인들을 명시적으로 탄압하였고 1933년 3월에 첫 강제수용소를 설치하여 자신들이 '불순하다'라고 여기는 인종의 사람들을 모두 몰아넣기 시작하였다. 이 수용소에는 주로 유대인,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이 수감되었으며, 그 외에 나치당에 반항하는 사람들이 대거 수용되어 고문당하거나 죽는 경우가 절대다수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점령 지역에서 계획적인 대규모 학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치는 정신적 장애가 있거나 신체적 장애가 있는 독일인들 수십만 명을 병원이나 요양원으로 보내 살해하기도 했으며, 특수작전 집단이 독일의 통치령 전역을 돌아다니며 유대인과 집시 등 수백만 명을 학살하며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제노사이드를 일으켰다 나치 독일은 팽창주의적 대외 정책을 펼쳐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국들을 위협하거나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의 바탕에는 식민과 인종청소를 통해 민족의 생활권을 확보하여야 한다는 레 벤츠 리움 사상이 있었다. 독일 민족이 다수 거주하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여 중부 유럽의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은 나치 독일은, 곧 1939년에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동년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을 올렸다. 나치 독일은 처음에는 승승장구하였고, 1941년 초에 이르자 유럽 대부분을 장악하거나 영향력을 미쳤다. 나치 독일은 점령지에 국가 판무관 부를 설치하여 통치하였으며, 특히 폴란드 상당 부분을 완전히 독일 영토로 병합시켰다

권력 장악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이 통치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원집정부제와 민주주의에 기반한 공화국이었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성립 직후부터 수많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초인플레이션과 정치적 혼란, 정당들의 분열과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과 껄끄러운 관계 등이 끊임없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목을 잡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프랑스에 배상금을 갚는 데에 실패하자, 프랑스 군대는 우르에 있는 독일의 공장 지대를 강제로 점령하였다. 이는 독일 대중들의 격분을 불러왔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갈수록 위태로워져만 갔다. 1929년 10월 24일, 미국의 주식 시장이 대폭락 하자 이는 미국의 달러에 깊이 의존하고 있던 독일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수백만 명이 실업자로 전락하였으며, 주요 은행들이 연이어 파산한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이러한 경제적 혼란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고자 하였다. 그들은 경제 재건과 일자리를 약속하였고, 강력한 정부를 바탕으로 국가를 다시 세울 것이라고 말했다. 유권자들은 나치당이 독일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 믿었고, 1932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나치당은 37.4%의 득표율로 230석을 가져가며 의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였다.



독일의 나치와

모든 사회 조직들, 농업 기구, 봉사 기관, 스포츠 클럽과 같은 조직들은 나치 당원이나 나치에 친화적인 인사들을 지도자로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사회단체는 당연히 나치에게 친화적인 성향을 보였으며, 나치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나치 정부는 1933년 노동절에 대대적인 기념식을 열었고, 많은 무역 협회 대표들을 베를린으로 초대하였다 히틀러 내각은 전권 위임 법을 사용하여 점차 독일 전역을 나치당과 히틀러의 지배하에 넣기 시작하였다. 나치당원이나 나치가 이끄는 연정 정부가 아닌 인사가 지배하는 주들은 모두 강제로 중앙정부에 복종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중앙정부가 파견한 인민 위원들의 뜻에 맞추어 정책을 펼 것을 요구받았다. 나치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상징을 폐지하였다. 이때 검은색, 붉은색, 금색으로 이루어진 삼색기가 공식적으로 사라졌으며, 대신 이전 독일 제국 시절 쓰던 검은색, 흰색, 붉은색의 삼색기가 다시 공식 국기로 제정되었다. 또한 나치당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또 다른 제2의 공식 국기로 제정되었고, 1935년 이후에는 유일한 국기로 떠 올랐다. 나치당의 단가인 기를 높이 내걸라는 제2의 국가로 제정되었다. 히틀러는 스페인 내전에서 독재자인 프랑 시스코 프랑코 장군을 군사적으로, 물적으로 지원하였다. 독일의 콘도르 군단이 이 내전에 참전하였는데, 이 군단은 1937년에 도시 게르니카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참사를 저질렀다. 1939년에 이르자 프랑코가 이끄는 군대 세력이 승리를 거두었고, 스페인은 나치 독일의 비공식적인 동맹으로 자리 잡았다.

반응형

'종교학 역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위일체  (1) 2022.10.04
이스라엘  (0) 2022.10.04
파시즘 이후 파시스트 건축  (0) 2022.10.01
신비한 고대 문명  (1) 2022.10.01
콘스탄티누스 1세  (1) 2022.09.2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