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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대마도 정벌

by 까롱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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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쓰시마는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에 있어 중개를 맡는 특수 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그 토지가 협소 척박(狹小瘠薄)하여 식량을 밖에서 구해야 생활을 유지하므로 고려 말부터 조공과 동시에 미곡(米穀)을 받아 갔다. 또 조선에서도 쓰시마 섬을 우대하였으며 쓰시마는 통상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들 때는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벌하게 되었다.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은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던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섬(대마도)을 정벌한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제1차 대마도 정벌은 1389년(고려 창왕 2년) 박 위가 이끌었으며, 제2차 대마도 정벌은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있었다. 가장 유명한 제3차 대마도 정벌은 1419년(세종 1년)에 이종무가 이끈 정벌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국(일본어: 応永の外寇)라고도 부르며, 당시 대마도에서는 누 마다케 전쟁(일본어: 糠嶽戰爭)이라고 하였다.

 

원인

1418년(태종 18)에 대마도는 큰 흉년이 들었다. 당시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종정무(宗貞茂, 일본어: 소 사자 시계[*]) 또는 종정아(宗貞芽)가 죽고 아들 종정 성(宗貞盛 뒤를 잇게 되었는데, 흉년이 들어 식량 문제가 심각해지자 크게 들고일어나 명나라의 해안 지역으로 가던 도중, 조선의 비인(庇仁)·해주(海州) 해안 지역을 약탈하게 되었다. 조선은 이때 승계한 새 도주인 종정 성이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직접 쓰시마 섬을 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때 기록을 보면, 명나라로부터 돌아오는 왜구를 중간에서 공격하는 방법과 쓰시마 섬의 본거지를 치는 두 가지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1419년(세종 1년) 6월 9일, 상왕이 된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중외(中外)에 교유하였다

경과

1419년(세종 1) 음력 6월 19일 거제도 남쪽 조원 방 포를 출발하여 20일에 쓰시마 섬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 종 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 지표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음력 7월 3일에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에 하도록 한 지 13일 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빼낸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이 대마도 도주에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당시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은 아직 군사에 관한 결정을 직접 하고 있었다. 태종의 주도 아래 장천 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로, 의정부 참판 최윤덕을 삼군 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명하고, 우박(禹博), 이숙 묘(李叔畝), 황상(黃象)을 중군 절제사, 유습(柳濕)을 좌군 도절제사, 박초(朴礎)와 박실(朴實)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 실(李之實)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 화와 이순몽(李順蒙)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에 있는 병선 227척과 병사 1만 7천 명을 거느리고 음력 4월에 출병하도록 명하였다. 출병을 지시한 세종은 태종과 함께 한강 두모포에 거동해 연회를 베풀며 출정식을 갖는다. 

 

결과

이 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원정대가 돌아온 후 다음 원정을 논의하였으나 사정상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 대마도 도주에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 정벌 이후 상당 기간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통상을 허락하여 일본인들이 평화적으로 무역과 내왕을 하도록 하는 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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