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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병자호란

by 까롱 2022.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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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 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만의 백성이 청 제국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 ~ 1637년 2월 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청 제국의 성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였으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홍타이지가 창제를 결심하고 조선에 보낸 사신은 인조와 접견을 못 했고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은 홍타이지에게 배례하지 않았다. 조선이 친명 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면전 전에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2만 군사로 조선을 침공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 야견 벽(淸野堅壁)으로, 강한 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 주변의 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써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체화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은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산성을 우회해서, 한양으로 신속히 남하하여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봉화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었으며,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되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였으나,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죽상에서 멈추었고(12월 19일) 12월 2일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라도 근 왕이 병마저 탄약 부족으로 퇴각함으로써 남한산성의 고립은 심화하였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청 야견 벽 전략에 따라 수성을 준비하다 허를 찔린 조선군은 청군의 뒤를 쫓아 기남 하였으나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의 우익 군에게 기습당하여 야문 미원으로 퇴각하였다. 야문 미원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하였으나 청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였다.

강화도에는 세자빈(소현세자의 부인)과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가 피난해 있었다. 인조와 조정은 수전의 경험이 적은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청군은 명수군 출신의 공유적이고 경중 몇 등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1월 19일까지 항복하지 않자 강화도 공격을 명령하였고, 청군은 1월 22일 새벽부터 강화도 상륙을 시도하여 당일 오후에 강화산성을 함락시켰다. 비축 식량의 소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인조와 조정은 1월 26일 강화도 실한 사실을 접하자 항전 의지를 상실했고, 결국 1월 30일(양력 2월 24일) 출석하여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에게 항복하였다.

 



전쟁 전 조선 상황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 복구사업, 이괄의 난으로 인한 정예병의 손실 등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이괄의 난으로 인한 1만 6,000명의 북방 군의 손실은 매우 큰 타격이었다. 당시 4 영군을 제외한 정규군은 북방 군이 유일했는데, 이괄의 난 때문에 7천500명의 정예병이 손실되었고, 수천의 속오군 병력도 피해를 보아 조선군의 전력이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인조의 국방정책으로 인해 조선군은 1만의 훈련도 감군, 2만의 충 융 군, 1만 4천 명의 수어 군들 확보하게 된다. 7천의 어영 군은 전국에 분산되어 속오군에 편제되며, 속오군의 전력을 더 강화했다. 전국적으로도 약 9만 명이 속오군이 마련되며, 3만 명의 수군과 약 600척의 전선을 확보했다.


 


배경

누르하치가 명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하자 수세에 몰린 면은 조선에 소총수 7000명을 지원하라고 요구하였고 누르하치는 파병하지 말라고 조선 조정에 강력히 요구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광해군과 그의 즉위를 도운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 신료들은 조선이 국내 수비에 치중하는 것이 후방 수비라는 차원에서 유익하다며 명이 한 요구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으나 임진왜란 때 명이 원군을 파견해 도운 일을 감안하면 원병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명에 원군을 보내되 싸움이 시작될 때 항복해 조선이 부득이 파병한 실정을 설명하게끔 하였다는 야사가 있으나 이는 파병된 인원의 80%가 전사한 뒤에 항복했다고 전해진다. 여진족은 그들이 세운 금이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 명나라 북동 지역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통일된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여진족은 명과 조선 양측에 이중으로 관계하던 중 아이신 교로 누르하치가 숙긴, 말갈, 여진을 규합,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들을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잦은 군대 동원과 이에 따른 경제상 손실은 명의 국력을 쇠약하게 만들고 몰락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정묘호란

1623년 4월 11일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이 급선회하였다. 서인은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했고 신료들은 광해군의 중립 대외정책을 기존 친명 배금 정책으로 바꾸어 조선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대로 명을 잘 모시어 받들려고 했으며, 후금에서는 조선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 왔던 홍타이지가 즉위하여 후금의 대조선(對朝鮮) 정책과 태도도 변하였다.

후금은 명나라와의 전쟁 탓에 교역로가 끊겨 물자 부족에 심히 허덕여 이를 조선과 하는 통교를 이용하여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후방을 안정시키려고 조선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과 적대 정책을 펼치는 조선을 정벌할 필요성을 강하게 인식하였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관의 잔당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정벌해달라고 종용하였다. 홍타이지는 더욱 결전할 뜻을 굳히어 이괄의 난 때 후금에 투항한 한명윤의 아들, 한온과 한 책과 1619년 부차 전투에서 항복한 강홍립을 데리고 조선 정벌에 나섰다.

1627년(인조 5년)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군사 3만을 일으켜 조선을 공격해 왔는데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이괄의 난으로 말미암아 북변의 군사 체계가 붕괴한 상태였던 조선은 수세에 몰렸고 조선 조정 내에서도 화의론이 대세를 이루고 후금도 오랜 기간에 걸치는 출병이 곤란했으므로 전쟁은 지속되지 않았고 청군은 약 두 달 만에 강화조약을 하고 철수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은 후금과 “형제 제 맹”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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