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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임진왜란

by 까롱 2022.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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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임진년에 일어난 왜의 난리란 뜻으로 지칭되며 그밖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에서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에서 임진전쟁(壬辰戰爭), 도자 기공들이 일본으로 납치된 후 일본에 도자기 문화가 전파되었다 하여 도자기 전쟁(陶瓷器戰爭)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문록・경장 의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ぶんろく・けいちょうのえき) 분로쿠 게이쬬우노에키[*])이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 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중국어: 萬曆朝鮮之役), 혹은 조선을 도와 왜와 싸웠다 하여 항왜 원조(抗倭援朝)라고도 하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 조국 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그 밖에도 7년간의 전쟁이라 하여 7년 전쟁(七年戰爭)으로도 부른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일본의 도요토미 정권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두 차례의 침략 중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뿐만 아니라, 명과 여진족 등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인구는 최소 100만 명 이상 감소했으며, 경작지의 2/3 이상이 황폐해지는 큰 피해를 보았다.

 

배경과 원인

이후 사림파 집권 이후 정권은 동인과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하였으며, 그 때문에 국정에 들인 노력보다 얻는 결실은 매우 적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져 권문세도가가 농장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제 도도 문란해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하는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실의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가 발생하였고 사림도 내홍 탓에 상호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명종이 모후 문정왕후의 대리 정치 탓에 외척 세력이 정치 중심으로 권력이 개편되면서 부패가 극심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차 쓰시마 국의 슈고 다이묘 소 요시토시를 이용하여 조선에 교섭을 청하였는데, 그들은 명나라와 사대 외교를 하고 싶어 하였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선조 23년)에 일본의 요구에 대한 응대와 더불어 일본 내의 실정과 히데요시의 저의를 살피고자 서인 황윤길을 통신사로,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그리고 허상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했다.

1591년 음력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도요토미의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자가 있어 그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통신사와 부사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당시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유병화(類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반면 김성일은 이에 반대하여 '그러한 정상이 없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조신 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동인인 허상마저 황윤길의 명견을 옹호하였으나, 당시 정권을 장악한 세력으로서 백성이 동요하면 자신이 향유하던 권력에 초래될 변화를 두려워했던 동인이 주도권을 주도하던 조선 조정은 김성일의 의견을 좇았다. 여기에는 당시 동인이면서 좌의정이었던 류성룡이 김성일 편을 든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후일 류성룡은 김성일을 두둔하고자 하였는지, 그의 저서 징비록에 “김성일이 나에게 말하기를 그 역시 일본의 침략 의지를 간파하였으나, '괜한 말로 조정과 신민을 동요케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거짓으로 임금께 보고하였고 통신사 황윤길을 꾸짖었다'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두 대신의 극명하게 달랐던 주장 중에 김성일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조선의 조정은 왜적의 침략에 대한 대비를 이완하였다

 

군사력

조선의 수군은 삼국시대부터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일본의 해적집단 왜구를 막아내는 과정에서 점점 강해졌기에 임진왜란을 "16세기 최강의 육군과 최강의 (조선) 수군이 싸운 전쟁"이라고도 하는데, 그 조선 수군의 '최강성'은 사실 이순신의 지휘를 받던 휘하 전라좌수영 군에 국한된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은 길 수(金睟)ᆞ이광(李光)ᆞ윤선각(尹先覺) 등에게 명령을 내려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고, 성 터를 수축하게 하였으며, 신립과 이 일로 하여금 변방을 순시케 하며 영남지방을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방비하고자 나름 힘을 기울였으나, 미온적으로 진행되어 커다란 성과가 없었다. 더불어 선조는 직접 이순신과 원균을 각각 전라 좌수사와 경상 우수사에 임명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에 배치하였으나 경상 우수사 원균은 왜란 3개월 전 부임하여 전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며, 이보다 앞서 한해 전에 전라 좌수사로 부임하였던 이순신은 지속적인 방비 체계를 쌓음으로써 개전 후 전라좌수영 수군의 계속된 승전의 기반을 닦았다. 거북선을 건조화하였는 바, 그 시험 운항은 왜란 발발 바로 하루 전에 이루어졌다.

 

조선 초 국방 체계

조선의 기본 병역 원칙은 양인 개병(良人皆兵)과 병농 일치(兵農一致) 제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正男: 장정)에게는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이때 정남은 정병(正兵: 현역 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保人: 보충역)으로서 실력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하는 두 가지 종류의 병역이 있었다...

이 원칙을 전제하여 군은 중앙군인 경 군(京軍)과 지방 군인 향군(鄕軍)으로 대분하여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태조 3년(1394)에서 세조 초까지 약 60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 개혁을 거쳐 5위 체제(의흥 위(義興衛), 용량의(龍?衛), 호분 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 위(忠武衛))의 편제가 확립되었다.

5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던 중앙군은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와 왕족, 공신, 고급관료의 자제들로 편성되었던 특수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지방 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을 수비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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