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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카를 마르크스

by 까롱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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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사회경제정치이론을 집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라 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인간 사회가 계급투쟁을 통해 진보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계급투쟁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와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투쟁으로써 나타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를 가르는 기준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지 여부다. 생산수단은 부르주아에 의해 통제되며,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에게 자기 노동력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임금노동자로 부려 먹힌다. 소위 사적유물론이라는 비판이론에 의해 마르크스는 과거의 사회 경제체제들이 그러했듯 자본주의 체제 역시 내재한 결함에 의해 내부적 긴장이 발생할 것이며 그 긴장에 의해 자멸하고 사회주의 체제라는 새로운 체제로 대체될 것이라 예측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런 불안정성과 위기 취약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계급적 대가 발생하고,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게 된다. 의식화된 노동자들은 정치권력을 쟁취하고, 마침내 계급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체로 구성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하리라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골자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예측이 현실화하기를 앉아 기다리지 않고, 노동계급이 혁명적 행동으로써 자본주의를 거꾸러뜨리는 사회경제적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저술·출판작업에 평생 매진했다. 


마르크스를 긍정하는 입장에서나 부정하는 입장에서나 모두 마르크스가 인류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하나임을 전제한다. 

 

그의 경제학 저술은 오늘날의 노동 및 노동과 자본의 관계에 대한 이해 대부분의 기초를 놓았다. 셀 수 없이 많은 학자, 노동조합, 예술가, 정당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고, 마르크스의 사상을 각자 재독해, 변형, 변용했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근대 사회학의 뼈대를 세운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진다 카를 마르크스(독일어: Karl Marx [ˈkaɐ̯l ˈmaɐ̯KS], 문화어: 카를 마르크스: 1818년 5월 5일-1883년 5월 31일)는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공산주의 혁명가다.


트리어 출신.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843년 예니 베스트팔렌과 결혼했다. 정치성 다분한 저술 활동으로 인해 마르크스는 무국적자 신세로 수십 년간 영국 런던에서 처자식과 함께 망명 생활을 했다. 런던에서 마르크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합작,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연구하며 주요 저작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은 1848년 출간된 소책자 《공산당 선언》과 3권짜리 《자본론》이다.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사상은 그 이후의 사상사, 경제사, 정치사에 거대한 영향을 남겼으며, 마르크스주의라는 일대 학파를 이루어 그 이름은 보통명사, 형용사화되었다. 마르크스의 어릴 적 삶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9남매 중 셋째였지만 형 모리츠가 1819년 요절하여 장남이 되었다. 마르크스 집안에서 성인으로 무사히 자라난 아이는 카를, 거친 껍질, 헤르만, 헨리에 테, 루이제, 에밀리, 열량이네 이렇게 2남 5녀였다. 7남매는 1824년 8월 루터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모친 헨리에 테는 1825년 11월에 세례를 받았다. 마르크스는 집에서 아버지에게 공부하다가 1830년 트리어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교장 후고 비텐바흐는 하인리히 마르크스의 친구였는데, 자유주의·인문주의 성향의 교사를 다수 고용하여 보수적인 지방정부의 눈 밖에 났다. 결국 1832년 경찰이 학교에 들이닥쳐 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자유주의 사상을 학생들에게 설파하는 것임이 드러났다. 당국은 이런 이념교육이 선동적 치안방해 행위라고 여기고 교직원 여러 명을 자르거나 교체했다. 이 모든 것이 카를 마르크스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1835년 10월, 당시 17세의 마르크스는 본 대학교로 갔다.

 

 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부친은 실용적인 법학을 공부하기를 강권했다. 18세 때는 '심장이 약하다'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대학교에서 마르크스는 시인동호회에 가입했다. 이 동아리는 경찰에 요시찰로 찍혀 있는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또한 마르크스는 트리어 주막음주향우회(Landsmannschaft der Treveraner)라는 동아리에도 가입해 공동 총재까지 지냈다. 그리고 논쟁이나 토론에도 참여했는데, 이런 논쟁은 때때로 심각하게 이어지기도 했다. 1838년 8월 보루시아 군단(Borrusian Kors)이라는 동아리와 결투가 벌어졌는데, 마르크스도 여기 참여했다. 마르크스의 성적은 첫 학기에는 상위권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쭉쭉 떨어졌다. 부친은 마르크스를 잡아다 좀 더 학구적인 분위기의 베를린 대학교에 집어넣었다 고전 자유주의자가 된 그는 당시 절대군주제였던 프로이센 왕국에 헌법을 제정하고 개혁하자고 선동하고 다녔다. 1815년, 하인리히는 변호사로 개업했고 1819년 살림이 펴서 포로 타니 그라 근교의 10칸짜리 저택으로 이사 갔다. 하인리히의 아내이자 마르크스의 모친인 헨리에 테 프레스 부르트는 네덜란드계 유대인으로, 이후 네덜란드 굴지의 전기공학회가 필립스를 창업하게 되는 부유한 사업 가문 출신이었다. 헨리에 테의 여동생 거친 껍질 프레스 부르트(1797년~1854년)기 이론 필립스(1794년~1866년)와 결혼했는데, 이 둘의 손자가 기라르트 필립스와 안톤 필립스이며, 증손자가 프리츠 필립스가 된다. 이론 필립스는 담배공장 사장으로 매우 부유했으며, 이후 카를 마르크스 부부가 런던에 망명 생활을 하면서 그에게 자주 생활비를 꾸었다 1837년, 마르크스는 문학과 비문학을 모두 써 본다. 마르크스가 쓴 문학 작품으로는 단편소설 〈전갈과 펠릭스〉, 희곡 《우울하네》, 그리고 약혼자 예지에게 바치는 연애 시들 따위가 있었다. 이 문학작품들은 마르크스 생전에 출간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는 곧 문학창작을 집어치우고 영어 공부, 이탈리아 공부, 미술사 공부, 라틴어 고전 번역에 몰두했다. 1840년에는 브루노 바우어와 함께 헤겔의 《종교철학 강의》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또 박사학위논문도 쓰기 시작하여 〈역사법학파 철학 선언〉을 1841년에 완성했다. 이 학위논문에서 마르크스는 신학이 철학에 지혜의 상석을 양보해야 한다고 대담하게 논했다. 이 논문은 논쟁적이었는데, 특히 베를린 대학교의 보수적 교수들 사이에서 그러했다. 마르크스는 논문 제출을 취소하고, 좀 더 진보적인 분위기의 예나 대학교로 가서 거기에 논문을 다시 제출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841년 4월 예나 대학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르크스와 바우어는 모두 무신론자였기에, 1841년 3월 《무신론기록원》(Arc hiv Des Atheism us)이라는 제목의 학술지를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으나 별 성과는 없었다. 같은 해 7월, 마르크스와 바우어는 베를린에서 본으로 여행을 떠났다. 둘은 만취하여 교회에서 떠들며 웃고 당나귀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는 등 기행을 벌여 구설에 올랐다. 


마르크스는 학자의 길을 계속 걷고 싶었다. 

 

하지만 프로이센 정부가 자유주의와 청년 헤겔주의를 계속 탄압했기에 마르크스의 진로는 좌절되었다. 1842년 마르크스는 쾰른으로 이사 가서 언론인이 되었다. 급진 성향의 『라인 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는데,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에 관한 시각과 경제에 대한 관심 등을 이 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유럽 각국의 우익 정부들을 비난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유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 역시 무능하거나 역효과만 불러온다고 비판했다. 이런 내용을 계속 싣던 『라인 신문』은 프로이센 당국의 검열에 걸려들었다. 원고 중 불온한 내용이 있는지 당국이 샅샅이 검사한 이후에야 인쇄를 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탄식했다. '경찰이 우리 신문에 코를 박고 킁킁대서, 무엇이든 반기독교, 반프로이센적인 냄새를 맡게 되면 신문을 아예 낼 수가 없다네.' 1843년 『라인 신문』에서 러시아 군주제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기사가 올라갔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프로이센에 『라인 신문』 폐간을 요구했고, 프로이센 정부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라인 신문』은 폐간되었다. 


1843년–1845년: 파리 망명키


1843년, 마르크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새로 창간된 급진좌파 언론 《독불연지》의 공편자로 취직했다. 독불연지는 독일 사회주의자 아르노를 수게가 독일과 프랑스의 급진주의자들을 합작시키자는 목표 의식으로 창간한 언론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 부부는 1843년 10월 파리로 이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노가 23번지에서 누게 부부와 동거하다가, 1844년 1월 첫딸 예니까 태어나면서 룩에의 집을 나왔다. 《독불연지》는 본래 의도와는 달리 독일 쪽 기고가들로만 가득 차게 되었고, 결국 비독일계 기고가는 러시아에서 망명 온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이 유일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 지면에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한 서설〉,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를 기고했다. 이 중 후자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동력이라는 신념을 소개하며 공산주의에 관한 수용을 본격화했다. 독불연지는 창간호밖에 나오지 못하고 폐간되었지만 상당히 잘 팔렸는데, 하인리히 하이네가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를 풍자하는 시를 기고한 덕분이었다. 그 결과 독일계 영방국가들은 독불연지 발행을 금지하고 수입된 부수들을 회수했다. 하지만 이렇게 성공했음에도 누에는 다음 호를 발행하기를 거부했고, 룩에 와 마르크스는 절교하게 되었다. 《독불연지》가 이렇게 망하고, 마르크스는 독일어 좌익언론으로 유일하게 검열받지 않던 《전진!》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전진!》은 파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공상적 사회주의 비밀결사 의인동맹의 기관지였다. 마르크스는 의인동맹 모임에 여러 번 참여하기는 했지만 가입하지는 않았다. 《전진!》에서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어바흐 사상에 기반한 변증법적 유물론 사회주의권을 갈고 닦으면서, 동시에 유럽 전역의 자유주의자나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44년 마르크스와 처음 만났다.


1844년 8월 28일, 마르크스는 카페 그 라 레장스에서 후일 평생의 물주가 되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처음 만났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자기가 최근 출간한 《잉글랜드 노동계급의 상황》을 보여주었고 노동계급이 역사의 최종혁명 주체이자 수단이 될 것이라고 논했다. 곧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서로 마음이 맞아 마르크스의 옛 친구인 브루노 바우어를 공격하는 데 합작했다. 그 결과물은 1845년 《석가족》으로 출간되었다. 마르크스는 막스 슈티르너나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같은 청년 헤겔 학파에 큰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 엥겔스와 함께 포이어바흐 유물론마저 등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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