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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고대 로마

by 까롱 2022.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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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세기 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씨를 뿌리고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시작된 제정 초기의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라틴어 문학 등 그레코-로만 문화의 전성기를 이뤘다. 트라야 누스 황제 시대(98년~117년)에 로마 제국은 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남으로는 아프리카 수단까지, 서로는 포르투갈의 대서양 연안에서 동으로는 캅카스 지방까지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 오늘날 면적으로 환산하면 현재 미국 면적의 2/3에 달하고 인구도 현 미국의 절반에 약간 안 되는 정도로 추산된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 공인 후 교황 선출 문제를 기화로 서로마, 동로마로 분할됐으며 이민족의 침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서기 5세기경 서로마 제국은 멸망 후 게르만족의 여러 독립 국가로 갈라져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등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여타 서유럽의 정치 세력들이 나타난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한다.

고대 로마(라틴어: Roma anti qua, 이탈리아어: Civilà romana, 영어: Ancient Rome)는 기원전 8세기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으로 고대 그리스, 오리엔트, 셈족, 서유럽 켈트, 게르만 등 문화의 용광로였다. 고대 로마의 문화, 법, 군사 체제는 서구 유럽, 동구권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의 법, 정치, 전쟁, 예술, 문학, 건축, 기술, 언어 분야의 기틀이 됐다.

고대 로마는 수백 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왕정에서 과두 공화정으로, 또 점차 제정으로 변모했다. 기원전 7세기경 로마는 지역 중심지로 번영하던 도시 국가로 왕정 체제였다. 기원전 509년에는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이 공화정을 세웠다. 로마인들은 평민과 귀족 간에 200여 년 이상 투쟁과 타협을 반복하며 로마 특유의 과두정 체제를 점진적으로 이루었다. 내부의 신분 투쟁 가운데도 로마는 외적들을 복속시키며 마침내 기원전 272년경 게누아(제노바)에서 이탈리아 최남단까지 거대한 동맹 체제를 수립했다. 로마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150여 년간 여러 정복 전쟁을 통해 갈리아, 카르타고 등을 정복하고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다.

왕정 시대는 공화정 이전 시대로 기원전 753년부터 508년까지이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로물루스가 세운 것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이 날짜는 기원전 1세기 말에 로마의 역사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설정한 것으로, 그는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 없이 고대 로마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을 연구하여 이 날짜를 도출했다. 현대 학자들은 로마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7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하고 있다. 기원전 7세기 말에 에트루리아 인들은 이 지역에 귀족·왕족 계급을 이루어 피지배층을 정치적으로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에트루리아 인들은 기원전 6세기 말경에 이곳의 지배권을 잃은 것이 확실하며, 이 시점에 라티움과 사비니 부족이 권력 집중을 억제하는 공화정 체제를 세웠다

에트루리아가 캄파니아에서 패배하고, 라티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게다가 산지 종족들이 라티움(latium)을 침공하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군사적 패배로 로마에 사회·정치적 위기가 일어나면서 왕정이 몰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연대 목록(fasti)에 기록된 기원전 509~507년을 왕정 몰락의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초기에는 군사 위원회 (military tribune)에 의한 공동통치의 형태였다가 독재관을 자주 선출하는 문제가 생기자 2명의 집정관 제도로 바꾸었다. 로마의 정체는 견제와 균형, 권력 분점으로 구성된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은 두 집정관으로 군사 통솔권인 명령권(imperium)을 통해 집행 권력을 함께 행사했다 로마는 점차 에트루리아 등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었다. 그중 베이 점령은 라티움 밖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징표가 되었으며 그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서 팽창을 거듭한다. 이후 삼니움 족의 캄파니아 침입에 개입하여 3차 삼니움 전쟁을 치렀고 여기서 승리한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패자가 된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앞두고 로마의 지배권에 마지막 도전장을 던진 세력은 그리스 식민 시 타렌툼이었다. 기원전 281년 타렌툼은 에페이로스의 피로스를 끌어들여 로마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 로마는 정복을 통해 전략 요충지에 로마의 식민지 건설하여 이탈리아에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로마는 3차에 걸쳐 포에니 전쟁(BC 264 - BC 146)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했다. 1,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초반에 카르타고가 우세했으나 결국은 로마가 승리하면서 로마는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나 에스파냐 등지를 정복한다. 후에 3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카르타고가 로마와 맺은 협약을 위반하여 로마의 침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여 폐허가 되고 만다. 이로서 로마는 서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기원전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 왕국 와 셀레우코스 왕국을 물리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는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술라의 부하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크라수스 세 사람이 제1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공화국을 농단했다. 이후 기원전 53년에 파르티아와 벌인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삼두정치는 카이사르와 원로원파로 돌아선 폼페이우스로 나뉘어 전개된다. 기원전 58년부터 7년에 걸쳐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갈리아 전쟁) 원로원과 대립하던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파 군대와 내전을 일으킨다(카이사르의 내전). 기원전 48년, 파르 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고, 탑 수스 전투와 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되어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독재 의혹을 받다가 공화제 헌정을 복원하려는 정적(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에 암살당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정권을 잡지 못하였고,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수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며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이 정치적 동맹은 권력 투쟁으로 기운다. 레피두스는 추방되며,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 지배자가 되었다
시대에도 영토 확장은 이어졌으며 안정을 유지했지만, 흔히 저열하고 타락했다고 평가받는 황제도 몇몇 있었다(가령 혹자는 칼리굴라를 정신이상자로 보기도 하며(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병이 걸려 폭정을 일삼았다). 네로는 국가 정사보다 개인 관심사에 더 몰두하며 잔인했다는 평판을 받는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네로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뒤를 잇는다.(AD 69 - AD 96)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 이후에 로마 번영의 시작을 알린 오현제 시대(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네르바, 트라야 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콤모두스)에 제국은 영토나 경제ㆍ문화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대략 80년간 지속되면서 이 시기에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시대에 제국은 번영했다. 트라야 누스 재위 시에는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의 정복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통하여 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되며, 그 지배 지역이 650만 km²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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