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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시의 구조와 불교 존재론

by 까롱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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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의 이원적 대립과 불교에서의 상호 대립 및 초극

현대시의 본질이 이와 같은 이원적 대립에 있는 것과 똑같이 불교 존재론에서도 이 세계를 상호 대립과 그 초극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문학이 바로 이 세계를 반영하는 언어의 한 양식인 까닭에 또한 현대시의 구조와 불교 존재론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한 내용은 일체유정()의 삶이 역설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중생은 그 자신의 본성 속에 불성(, Tathāgatagarbha)을 구유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끝없는 업의 연기() 속에서 생사 번뇌의 윤회를 되풀이하며, 연기의 이법 또한 그 자체 불일 불이(不一不二)의 법으로서, 결국 삶이 있으므로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므로 삶이 있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자는 개별적(차별상)인 존재()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존재()라는 역설을 성립시킨다.

대승()의 교조라 불리는 용수(, Nagrjuna)의 소위 이제설()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제설이란 속제()와 제일 의제(第一義諦)를 가리키는 말로, 전자는 현상계에 입각하여 제법을 관찰할 때 우주 만물은 하나도 부정할 것 없이 실상 그대로 존재한다는 인식이요, 후자는 본체계()에 입각하여 볼 때 모든 만유()는 무자성(無自性) 한 것으로 결국 공(空) 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세계를 이와 같은 모순으로 보는 것은 아이러니, 즉 이원적 대립이라 할 수 있다. 속제는 '유()'에, 제일의제는 '공()'에 해당하므로 이제()는 궁극적으로 일제, 즉 불이()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화엄종()이 연기를 설명하는 원리로써 제시한 소위 법계 연기설을 고찰해 보아도 우리들은 연기의 원리가 역설에 기초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법계 연기설(法界緣起說)에서는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인연에 의하여 생멸하는데, 인연의 상호 작용은 육의()로써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육의의 근본 작용인 인()은 그 자체가 '유()', 또는 '공()'의 모순 개념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역설적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의미에서 법계 연기설을 공간적 관계에서 설명하는 동체 이체설(同體異體說)이나 상 즉상 입설(相卽相入說)도 모두 역설적 진리를 설명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즉, 연기를 일으키는 일체 제법(一切諸法)은 어떤 일법()을 주로 하여 볼 때에는 그 일법 자체(一法自體)의 인() 가운데 이미 연()이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제법()과 더불어 동체()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타의 존재를 인정하며 타자의 연에 따라 연기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또한 이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적 세계관에서 자타와 주객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자로서 존재하며 상호 동화 혹은 치환된다. 모든 사물에 불성이 있다든가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공()하다든가 하는 견해는 이러한 인식의 다른 표현이다.

연기론의 상즉 원리, 현대시론의 상호참여성

연기론은 자연()과 타연(他緣) 사이에 자(, 주체)가 즉 타(, 객체)가 되는 상즉()의 원리를, 그 작용상으로 볼 때 자()의 작용하는 힘으로 타()를, 타의 작용하는 힘으로 자를 내포한다는 뜻에서 상입()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현대 시론의 원리인 소위 상호 참여성(lawlaw of participation)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말도 실은 이 같은 역설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불교 존재론에서는 모순의 관계에 있는 이제()는 단지 모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속제와 제일 의제의 이 모순은 초극되기 때문이다. 즉, 이 모순이 초월되는 곳의 만유 제법(萬有諸法)이 '무()' 또는 '필경 공(畢竟空)'의 경지에 있게 됨은 다 아는 바와 같다. 루돌프 오토(Roudolf Otto)는 이것을 "'둘이 아님( : Not-twoness Nichtzweicheit)' '하나로서 똑같음(Oneness)' 그리고 '모순의 통일(Coincidentid Oppositorium)'로 표현되는 신비적 직관"이라는 말로 설명하였는데, 이는 현대시의 원리에 있어서 두 가지 모순 혹은 대립되는 가치들이 조화 혹은 통일을 이루는 것과 대비된다.

이렇게 이 세계의 진리, 특히 존재론적 진리가 비논리적이며 이성의 체계로 해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면 결국 언어는 진리를 표현함에 있어 무용한 것이 되고 만다. 즉, 어떤 궁극적 진실‒초월적·존재론적 진실을 추구하는 데 일상적인 언어는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인간의 삶과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모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반하여 언어란 사실과 논리를 토대로 해 이루어진 기호체계인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불교가 언어를 부정하고 궁극적으로 '무의 언어' '무소설'을 지향한다는 것은 앞장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범인에게 있어서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언어를 떠나 달리 방법이 있을 수 없다. 부처가 일상의 논리적 차원을 벗어난 어떤 '특별한 언어', 즉 역설을 차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처는 오직 역설을 통해서만 그 자신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불자들이여 이 보살은 열 가지 항목을 익혀야 합니다. 즉, 일()은 다()이고, 다는 일이며, 가르침에 따라서 의미를 알고, 의미에 대하여 가르침을 알고, 비존재()는 존재이고, 존재는 비존재이며, 모습을 갖지 않은 것이 모습이며 (후략)" "(법이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는 것이다" "불도를 배우려고 하는 것은 자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배운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등등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현대시의 언어와 불교 언어의 동일성, 더 나아가 현대시에 끼친 불교의 영향을 성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현대 시론에서 시의 언어는 아이러니 혹은 역설의 언어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명사가들에 의하면 오늘날 서구 문명사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문명사적 종말을 새로운 이념의 확립으로 극복하고자 하며, 그 가장 가능성 있는 대안의 하나를 동양의 예지, 그중에서도 불교나 노장사상에서 찾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서구의 현대 시론이 불교 세계관이나 선사상으로부터 많은 자양을 섭취하고자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모순되는 두 가치의 대립과 카타르시스

 

현대시의 원리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것 중 하나는 '모순 혹은 대립되는 것들의 조화 혹은 통일'이라는 개념이다. 시란 그 구조에서든, 진술에서든, 혹은 상상력에서든 서로 대립 혹은 모순되는 가치, 이미지나 정서나 의미 지향들이 서로 갈등을 이루다가 결국은 하나로 조화 혹은 통합을 이룬다는 주장이다. 이는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비극)의 본질이 '아이러니'와 '반전(, peripetia)'에 있다는 견해를 밝힌 이래 현대에 들어 그 어떤 유형의 비평론이든 원칙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이론이기 때문이다. 가령 영미 신비평의 아이러니, 패러독스, 텐션, 형이상학적 시, 형식주의나 구조주의의 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 양극의 대립(polar opposition), 병렬(parellelism), 전환(, conversion) 등과 같은 개념이 다 그러하다.


가령 오늘날 영미 비평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리차즈(I. A. Richards)는 시의 본질을 아이러니에서 해명하여 그것이 두 가지의 모순되는 가치, 즉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우호적인 충동(impulse to approach)과 배타적인 충동(impulse to retreat)의 조화(ballance 혹은 reconcilliation)에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상상력이든 정서나 감정이든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정서의 경우 그는 그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지적한 소위 '공포'와 '연민'이라는 두 감정의 대립과 카타르시스에서 찾았다. 한편 리 파테르(MichaelRiffatairre)는 시의 본질을 이원적 대립으로 설명한 바 있다.

진술에 그 시적인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환기창(soupil-rail)')을 표면적으로 드러내 실현(현동화)시키는(actualization) 하이포 그램(hypogram, 그 진술을 묘사해 주는 체계)이다. 이 하이포 그램은 양극의 대립들로 특징지어진 문법과 단어들의 배열을 갖는 것에 의해 일어난다. 필자는 영원히 시적인 언어의 하이포 그램들 속에는 언제나 양극화가 현재 한다고 믿는다. 나아가 필자는 이 양극화가 그 시적 본질에 있어서는 필연적이며 그 언어적 전형을 위해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다. 양극화는 현저한 대조를 야기시킨다. 그것의 해소(대립되는 양극 사이의 등가적 진술에 의한)는 역설, 모순어법 그리고 기상()을 생성한다. 양극의 대립 속에서 행해지는 어떤 진술도 그것의 유사성이나 동의어 성의 패러다임을 배양해 내는 쪽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즉, 그들의 의미론적 영역은 참된 양극의 기하학이 된다. 



현대시가 그 본질을 제 가치들의 이원적 대립에 두고 있는 것은 그것이 담고자 하는 세계 혹은 인간의 삶 자체가 모순의 총체성으로 존재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최초 개념이라 할 아리스토텔레스의 소위 '비극적 아이러니'와 기회 원인론적(機會原因論的, Occassionalism) 세계관에 토대를 둔 근대 낭만주의자들의 '낭만적 아이러니'가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모두는 이 세계를 모순 혹은 역설로 파악하여 이를 문학적으로 반영한 데서 형성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에 대한 인식은 이후 현대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특히 철학에서 실존주의, 문학에서 신비평의 초석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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