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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게송

by 까롱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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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가르침을 전하는 노래, 선시

'선시()'라는 말이 어느 때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 불교와 관계되는 시들을 어떤 특별한 개념 정의 없이 대개 심정적·편의적으로 호칭해 왔던 용어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선시'의 의미는 매우 포괄적이며 또한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이 용어가 불교사전이나 문학 사전, 그리고 국어사전 등 그 어느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불교는 문학과 관계가 깊다. 특히 시가 그러하다. 원래 불가에서는 일찍부터 세존의 가르침이나 선사들의 깨달음을 노래한 응송(), 게송, 오도송, 증도가(), 열반송(), 임종게(), 전법게()와 같은 운문 형식들이 있어 왔는데 이 모두는 넓은 의미에서 시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로 물론 사문(), 즉 승려들의 소작이다.

응송은 12부경(경의 성격과 형식에 따라 일체의 불경을 12개 유형으로 나눈 것)의 하나인 범어의 기야(, Geya)를 번역한 것인데, 앞장에서 개진한 설법 내용을 한 번 더 되풀이해서 운문 화한 것, 즉 산문으로 된 경을 다시 운문체로 바꾸어 놓은 형식의 시를 가리키는 말이다. 긴 산문의 경전에 응하여 그 뜻을 운문으로 편다는 의미에서 '응송'이라 한다. 가령 『법화경 』 「방편품 便」 제2에 보면 석가모니불의 설법을 듣던 사리불()이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간곡히 부처님들의 제1방편을 찬탄하셨나이까. (중략) 원컨대 세존이시여, 이를 설명해 주시옵소서.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매우 심원하고 미묘하며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을 찬하셨나이까" 하고 묻자 세존께서는 "그만두라. 그만두라. 설법해 무엇하랴. 만약 이를 설한다면 일체 세간()의 천인이나 인간들은 다 놀라고 의심할 것임에 틀림없는 까닭이다"라고 설한 뒤에 다시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만두라. 그만두라
나의 법은 어렵고도 미묘하여서
오만한 자 이 법을 익히 들으면
반드시 믿지 않고 공경 않으리.

 

부처의 교리를 창의적으로 노래한 게송

게송 역시 12부 경의 하나이다. 응송이 산문의 경전을 다시 운문으로 고쳐 쓴 것임에 반해 게송은 전제되는 경전 없이 부처의 공덕과 교리를 창의적인 노래나 글귀로 찬미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3자 내지 8자를 1구()로 하고, 4구를 1게()로 하는 형식을 취한다. 원래 게는 범어 '게타(, Gatha)'의 첫음절을 음으로 빌린 것이고 송()은 그 뜻을 빌린 것이므로 게송은 범어와 한자의 합성어라 할 수 있다. 『법구경 』은 특별히 모두 게송으로 되어 있는 경전이다.

일반 경전에서도 세존의 설법을 들은 대중이 이에 감응하여 그 가르침이나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로 찬미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가령 『법화경』 「묘장엄 왕 본사품」 제27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부처께서 묘장엄이라는 왕에게 설법을 하였는데, 그 자리에 왕비 정덕()과 두 아들 정장(), 정안()도 참배하였다. 설법을 들은 두 왕자는 크게 느낀 바 있어 부처를 따라 출가하고자 하지만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두 아들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고 있다.

원컨대 어머님은 저희들이 출가하여
사문으로 수도토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부처님 만나 뵙기 심히 어렵나니
저희들이 찾아가서 따라 배우리다.
오랜 겁에 한 번 피는 우담발화보다
부처님의 세상 출현 그 더욱 어려우니
여러 가지 많은 환난 해탈 키도 어렵나니
원컨대 저희들의 출가 허락하옵소서.


부처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의 게송들도 많다. 『법화경』은 원래 세존이 왕사성()의 기사 굴산(耆些崛山)에서 비구의 무리 1만 2천 명과 함께 머물며 한 설법이다. 그중 『수학 무학 인기품 』 제9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 세존이 학습에 열성인 제자들, 즉 아난()과 나후라()를 칭찬하며 그들이 마침내 성불하게 될 것을 예언하자 학습을 완료한 이천의 제자들이 기뻐 날뛰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 불렀다.

지혜의 밝은 등불 거룩하신 세존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수기의 음성 듣고
마음 크게 환희함이 온몸에 가득하니
감로의 단비를 퍼부은 것 같나이다.


『능가경 
』 앞머리에 실린 다음과 같은 장편 게송에는 세존에게 설법을 구하는 사문의 간절한 해탈에의 염원이 피력되어 있다.

어떻게 그 마음을 청정히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증장()합니까.
어떻게 치혹()을 깨닫고
어떻게 그 번뇌는 커지는 것입니까.
(중략)
무슨 까닭에 불자라고 이름하며
해탈이란 어느 곳에 이르는 것입니까.
누가 묶고 누가 해탈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선()의 경계입니까.
왜 삼승()이 있습니까.
바라옵건대 해설하여 주옵소서.


이렇듯 게송이란 원래 경전의 일부를 구성한 시가의 한 형식으로 부처를 찬미하거나 사문의 도리를 다짐하며, 혹은 깨우침의 환희를 노래하거나 부처에게 설법을 구하는 내용으로 오랫동안 전래된 것이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러 특히 선가()에서는 이의 전통을 수용, 시 혹은 노래를 통해 부처의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하는 관례가 보편화되었다. 즉, 선림()에서 선승()이나 운수()가 선문답이나 기타 선생 활에 관계되는 많은 노래를 지어 부름으로써 오늘날 '선시'라 할 수 있는 게송의 한 독특한 장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 후자의 의미로 게송은 그 내용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세분될 수 있다.

공안시

첫째, 선문답을 시로 읊은 공안 시라 부르는 유형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벽암록』과 『종용록』에 수록된 게송들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 『벽암록』은 설두 선사가 선사상사에서 중요한 고칙공안(古則公案) 백 칙()을 가려 뽑아 해설한 책으로 그 구성은 수시(), 본칙(), 송(), 착어(), 평창() 등 다섯 개의 강목으로 나뉜다. 본칙은 역대 선덕()과 선사()들의 공안 백 칙 그 자체이고, 송은 이 본칙을 노래로 읊은 것이다. 또한 수시는 이 본칙 앞에 후인들을 위해 이 본칙이 지닌 중요한 요점을 적은 것이고, 착어는 본칙이나 송의 각 구절을 주해한 것, 평창은 총평에 해당하는 것이다. 본칙과 송은 저자인 설두 자신이 뽑아 노래한 것이나 그 외 수시, 착어, 평창 등은 후에 설두의 제자인 환오()가 붙였다. 그런데 그중 '송'이 바로 선가에 보편적으로 전래되어 온 게송의 한 전형이 되었다.

가령 『벽암록』 제9칙은 '조주 사문(趙州四門)'이다. 어느 날 한 운수가 조주 화상을 찾아와 물었다. "조주, 조주 하는데 그 조주란 본래 어떤 것입니까?" 그러자 조주는 "조주에는 동문()도 있고 서문(西)도 있고 남문()도 있고 북문()도 있지" 하고 대답하였다 한다. 이에 소위 '조주 사문'은 선의 중요한 공안의 하나가 되었다. 설두는 이 본칙에 다음과 같은 게송을 붙였다.

말속의 뜻을 담아 다그쳐 보았으나
금강()의 눈은 티 없이 맑기만 하구나.
동서남북에 문이 마주 보고 서 있으니
철퇴를 마구 휘둘러도 열리지 않네.
– 조오현() 옮김

개오시

둘째, 개오시()라 부를 수 있는 유형이 있다. '개오'란 『부법 장전』의 '동시 개오(同時開悟)'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지혜를 열어 진리를 깨닫는다는 뜻으로, 개오시는 대덕 고승이 깨우침을 얻어 인생관이나 우주관과 같은 큰 진리를 알게 되었을 때의 환희를 시로 쓴 것이다. 소동파의 「오도송」과 당나라 때의 영가(永嘉) 대사 현각()이 지은 「증도가」가 특히 유명하여 그런 까닭에 이러한 유형의 시를 별칭 '오도송' 혹은 '증도가'라 부르기도 한다.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말을 들으매
온 우주가 나 자신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래 길,
할 일 없는 들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 경허 성우(鏡虛惺牛), 석지현 옮김

 

시적시

셋째, 시적 시라 부를 수 있는 유형이 있다. 고승 대덕이 열반에 임하여 우주 만상의 깨우침을 시로 쓴 것이다. 고승이 입적할 때 도를 완전히 이루어 일체의 중생고()와 번뇌를 끊고 불생불멸의 법성()을 증험한 시, 달리 말해 해탈의 경지를 쓴 시이다. 원래 범어로 '열반(Nirvana)'이란 멸()을 의미하며 '원적()'으로 번역되는데, '멸'이란 생사와 인과의 멸, 멸도는 그 멸을 통해 고()의 폭류()를 건넌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한자의 '원'은 덕이 모두 갖추어진 것, '적'은 장()이 모두 진한 상태, '시적()'의 '적'은 적멸을 가리킨다. 따라서 시적은 '적멸(열반)을 시현()한다'는 뜻으로 곧 부처나 보살 대덕의 죽음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적 시는 '임종게' 혹은 '열반송'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목숨이란 물거품이니
팔십여 년이 봄 꿈속에 지나갔네.
가죽 주머니(육체)를 버리고 돌아가니
한 덩어리 붉은 해는 서산에 지고 있네.
– 태고보우(), 석지현 옮김

 

선리시

넷째, 선리 시라 불릴 수 있는 유형이다. 선의 이치와 본질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선종의 제3조()인 승찬()의 「신심명 」, 당나라 때 석두 희천(石頭希遷)이 지은 「참동계 」 등이 그 대표작이다. 「신심명」은 선지()의 대요를 철학적으로 설파한 노래이고, 「참동계」 역시 부처가 가르친 불일 불이(不一不二)의 법을 5언 44구, 도합 220자로 쓴 장편 고시이다. 「참동계」는 선림 특히 조동종()이 중히 여겨 아침마다 불전에서 낭송해 왔다. 그 내용은 현상계가 즉 본체계이며 본체계가 즉 현상계이니, 그것은 하나도 아니요 그렇다고 둘도 아니라는 사상이다. '참'은 만법 차별의 현상을, '동'은 만법 평등의 본체를, '계'는 평등이 곧 차별이요 차별이 곧 평등임을 뜻하는 말이다. 우주는 불일 불이(不一不二)하다는

밝음 속에 나아가 어둠이 있나니
어둠으로서 서로 만나지 말라.
어둠 속에서 나아가 밝음 있나니
밝음으로써 서로 보는 일 없게 하라.
밝음과 어둠이 각기 서로 상대하니
그것은 마치 앞발과 뒷발의 걸음과 같다.
– 석두 희천(石頭希遷), 「참동계」 8, 동봉() 옮김

여기서 밝음과 어둠은 각각 현상계와 본체계를 의미하고 있다.

전법게

다섯째, 선림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선법()을 전하는 내용의 시인 전법 게이다. 다음의 시는 서산대사(西) 휴정()이 제자 완 허당(玩虛堂)에게

법이여, 법이여 본래 법은 없는 것이니
법이 없는 이 법 또한 법이 없네.
지금 '법이 없는 법'을 그대에게 전해 주노니
이 법을 길이 멸하지 않게 하라.
– 청허휴정(), 석지현 옮김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선시란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내용의 불교시를 지칭하는 용어 이상이 아니다. 요컨대, 선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경전에 수록된 시로서, 응송과 경전의 게송이 이에 포함된다. 둘째, 선림의 게송으로, 여기에는 선문답에서 사용되는 게송(즉 공안 시), 오도송이나 증도가와 같이 깨달음을 읊은 개오시, 열반송이나 임종게와 같이 고승대덕이 입적할 때 읊은 시적 시, 「신심명」이나 「참동계」와 같이 선의 이치나 본질을 가르치는 선리 시, 스승이 제자에게 법을 전하는 전법게 등이 있다. 이 모두는 경전에 수록되어 있거나 혹은 선림에서 선을 목적으로 지은 시들로, 간단히 말하면 '선의 시'이고, 이런 것들이야말로 좁은 의미의 선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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