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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누르 앗딘

by 까롱 2022.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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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 앗딘 생애



1146년 아버지 장기가 암살된 후, 영토를 형과 분할해 시리아의 서쪽 절반을 얻어 알레포의 태수가 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꾀해 셀주크 왕조의 여러 지방 정권과 동맹을 체결해 안티오키아 공국과 영지 탈환을 목표로 하던 에데사 백 국과 싸웠다. 1148년 제2차 십자군이 원정해왔으나, 그들은 예루살렘 왕국과 친하던 다마스쿠스를 공격해 누를 앗던 과 다마스쿠스를 접근시키게 했다. 아나톨리아의 룸 술탄국은 자신들이 셀주크 왕조의 정통을 이어받은 것이라 인정하지만 아나톨리아에 대한 지배의 정통성에는 의문을 갖고 있기에 계속해서 대립하고 있었다. 특히 킬리지 아르슬란 2세와는 즉위 당초부터 항상 주변 아 타 베고 정권인 셀주크 왕조 계의 세력과 대(對) 비잔티움 제국 정책 등에서 대립하고 있었다. 킬리지 아르슬란이 동방 진출을 기도하자 당시 시바스, 마라실, 말라티아 등의 동 아나톨리아 일대를 영유아던 셀추크 계 아미를 가계였던 다니 슈 멘 그 가문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였다. 제2차 십자군이 성과를 얻지 못하고 철수한 후, 안티오키아 공국의 영토 대부분을 빼앗고 안티오키아의 공작 레몬을 사로잡아 처형하였다. 그 후 에게 사 백작도 사로잡아 누를 앗긴 의 지배는 안정되었다. 1154년 다마스쿠스도 장기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 시리아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1164년 때부터 십자군 세력과 전투를 접고 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와 동맹을 맺고 셀주크 왕조의 술탄과 다툼을 벌였다.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예루살렘 왕국의 공격을 받게 되어 지원을 요청하자 누를 앗 뎀은 쿠르드족 출신의 휘하 장군 싫고 (살라 앗 덴의 삼촌)'을 이집트로 파견했다. 1169년 살라 앗긴 이 이집트의 재상이 되어 이집트를 완전히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살라 앗긴 이 사실상 독립하여 1171년, 1173년 누를 앗긴 의 예루살렘 공격에도 참여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자신과 누를 앗던 세력의 완충지대로 존속하길 바랐다 예루살렘 공략과 제3차 십자군 등의 전투로 인해 이슬람의 영웅으로서 살라 앗긴 이 유명하지만, 그 기반은 누를 앗 뎀이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용모가 수려하고 단정하며 용맹한 전사여서 전장에서는 활과 화살통을 2개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솔선하여 전선에서 싸웠다고 전해진다. 또한 알레포, 다마스쿠스 등에 누리야 대학은 그가 창설한 것으로 셀주크 왕조의 니자미 야 대학과 함께 시리아 일대에 하나피 법학파 등의 수니파 교학의 진흥에 큰 공헌을 하였다. 1174년 독립한 살라 앗김을 처벌하기 위해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던 누를 앗 뎀은 5월에 열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아들 앗살리흐 이스마일이 그의 뒤를 이었으나, 살라 앗긴 의 이집트 정권(아이유브 왕조)에게 병합당한다. 알 말리크 알 아딜 누를 앗던 아부 알 커짐 마무드 이쁜 이마들 앗던 장기 또는 누를 앗딘(1118년~1174년 5월 15일, 아랍어:نور الدين)은 시리아 등을 지배한 셀주크 왕조 계의 아 타 베고 정권 장기 왕조의 제2대 술탄(재위:1146-1174)이다. 장기의 아들로서 십자군 국가와 이집트(파티마 왕조), 다마스쿠스(부리 왕조)와 싸워 영토를 넓히며 이슬람 세력의 통일을 꾀했다. 십자군 측 사료에는 누 라디우스(Noradinus)로 나오기도 하며, 이름의 뜻은 '종교/신앙의 빛'이란 의미이다. 흔히 서방에서는 누레 되므로 줄여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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