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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역사학

유대교

by 까롱 2022.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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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대종교와 유파

유대교(히브리어: יהדות Yahadut 야하듯, 이디시어: ייד, 영어: Judaism 주둥이쯤) 또는 유태교(猶太敎), 유다 교는 유대인들의 민족종교로, 최초의 아브라함계 유일신교이다. 현대의 유대교는 유대 종교의 일부인 바리새파 만이 전해져 현재의 유대교가 되었다. 과거 유대 종교의 유파인 사두게, 바리 새, 에시네, 멜롯 등의 다양한 유대종파가 있었으나 기원후 1세기 이후에 단절되었다. 이후 기원전 2세기에 형성된 바리 새 유파만이 남아 현재의 주류 유대교를 형성하였다.  현재 유대교는 바리새파 의 해석 전승에 따라 정경인 《타나크》(히브리 성서)에서 시작되었고 탈무드와 같은 이후의 성서의 원본으로 탐구되어 온, 유대교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퍼졌다. 전 세계 신도 수는 약 1,400만 명이다현재의 유대교에 영향을 끼친 고대 유대 종교의 유파는 바리새파다. 학술적으로 유대 종교의 시작은 바벨론에서 돌아와 재건한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원전 5세기가 기준이다. 기원전 10세기경의 이스라엘 왕국의 성전 종교가 있으나 현대 유대교에는 간접적인 반영이 있으며 직접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기원전 5세기 유대 종교는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장이 된 레위 지파 후손을 몰아내고 제사장 직분을 차지한 사두개파와 기원전 3~2세기경부터 헬라 주의의 영향 아래서 형성된 바리새파와 에세네파가 있다. 이들은 기원후 70년까지 상호 영향을 끼치며 발전하였지만, 70년 로마제국의 이스라엘 저항 평정과 유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 파괴, 반로마제국 자들 축출로 친로마제국 성향의 바리새파만이 현재 유대교의 뿌리로 존속하게 되었다.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지역별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제사장과 긴장 관계와 해석에 대립했지만 적대적이지 않고 보수적인 성향으로 상호 영향을 주었다.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의 이스라엘 전쟁과 성전 파괴 기간에는 친로마제국적 태도를 취해 바리새파 중심인 회당은 파괴되지 않았고 전승과 문서를 보존할 수 있었다.

바리새파(Pharisees)는 분리, 분별한다는 뜻으로, 기원전 2세기 형성되었으나, 이들 전승에서 기원전 5세기 애저라는 시작으로 본다. 유대 종교의 레 위인 전통의 보수파에 해당한다.

이들 시작은 2세기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을 차지한 사두개파에게 축출당한 보수적인 기존 제사장직의 레위 지파 출신 학자와 전직 제사장이었다. 이들 중심으로 2세기 무렵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헬라 주의 영향 아래 형성한 유파였다. 이 시기에 당시 유대왕국의 왕족에 의해서 새롭게 형성된 사두개파의 성전 중심적이고 혈통적으로 부족한 제사장의 율법 해석과 제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인식하였다. 이들도 반 헬라 주의적 배경을 지녔으나, 생존을 위해 당시 사회에 합당한 율법의 해석과 세부 규칙에 대한 제정, 율법 학습 방법에 대한 연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율법에 따른 행위와 계약 등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7] 이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지냈으나 대부분 신흥 사두개파에게 축출당한 제사장의 후손이었으므로, 대부분 수공업 같은 일반 직업을 가지고 동시에 회당에서 활동하였고, 일부만이 직업으로 회당에서 필 사업부와 교육, 율법해석 업무를 했다.

 

사두개파


이들은 기원전 3세기 기존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기존 제사장이었던 레위 지파인들 을 밀어내고 제사장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선지자나 유전(遺傳)되어 온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성전의 제사장 직급으로 오경(토라, 율법서)만 정경으로 여기고, 모세 율법은 자유롭게 해석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이후 완전히 사라져 바리새파에 흡수되었다.

사두개파(Sadducess)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파였다. 기원전 6세기 말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대인이 기원전 5세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성전 중심주의적이며, 동시에 인종주의적 견해를 바탕으로 정치적으로 제사장직을 장악했고, 계급적 제사장 자리를 지킨 이들이다. 사두개파는 혈통적으로는 제사장 승계가 보장된 레위 지파 후손이 아니었다. 기원전 3~2세기에 성전에서 활동하던 레위 지파 후손을 정치적으로 축출하고 제사장직을 차지한 이들의 후손이었다.

헬라 주의 지배받게 된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사이 성전 재건 시기에 정치·경제적으로 헬라·로마 문화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들은 헬라 주의적 정치 성향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으로는 헬라 문화와 기존의 유대 문화를 기준 짓기 위해 노력했다. 


 

젤롯파

 

멜롯파는 에세네파 내에서 더욱 진보적인 성향의 부류가 흔히 열심당으로 알려진 젤롯 파로 발전하였고, 이들은 기원후 1세기 로마제국의 이스라엘 지역 지배에 대해 반발한 무장 저항 세력을 형성하였고 이스라엘 무장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이에 따라서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시기에 멜롯은 로마제국의 직접적 공격을 받았고, 멜롯과 함께 에세네파 역시 로마제국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살아남은 이들 중 많은 수가 기독교에 흡수되었고, 동시에 바리새파에도 흡수되어 기원후 1세기에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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